[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빛나는 웅진기 백제의 왕성(王城), 공산성을 돌아보다]
- 오전 태화산 산행을 마친 후 마나님 핑계로 게으름병이 도졌다. 본래는 마누라를 카페에서 기다리게 하고 홀로 미궐산을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배가 부르니 갑자기 이것저것이 번거롭고 귀찮아졌다.
그리하여 선택한 일정이 공산성이다. 숙소와 가까운데다 관광하는 느낌으로 한 바퀴 여유롭게 걸어볼 요량이었는데... 산성은 산성이었다. 누적고도 200미터 이상을 오르는, 가벼운 산행이 되어버린 셈이다.
- 공주의 옛이름은 ‘고마나루’라고 하며,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합니다. 웅진은 백제의 도읍 한성(서울)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면서 새로운 도읍이 되었습니다. 웅진도읍기(475~538년) 백제의 왕성은 웅진성이며, 지금의 공산성입니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은 북쪽에 흐르는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公山)의 산세를 활용하여 축조된 천연의 요새입니다.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있는데, 동쪽구역의 토성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백제시대에는 왕궁을 비롯한 주요시설 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벽, 연못, 나무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유물은 토기, 기와, 중국제 자기, 무기, 목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정관19년(645)’명문이 쓰인 화려한 옻칠갑옷이 출토되어 주목되었습니다.
공산성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5방성 가운데 북방성이었고, 무왕31년(630) 사비의 궁궐을 수리할 때에는 왕이 공산성으로 거 처를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아울러 660년 7월에는 의자왕이 사비에서 공산성으로 피신해 와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다 항복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의 치소로,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과 중군영이 자리하는 등, 오랫동안 지방의 거점이자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습니다.
공산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로 토성으로 알려진 동쪽구간 735m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조선시대 이후에 고쳐 쌓은 것입니다.
백제시대의 공산성은 지형에 따라 토성과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는 공산성 동쪽 구역과 조선시대 석성 아래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동쪽구간은 전체가 토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조사를 통하여 토성과 석성이 함께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토성은 고운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판축기법을 주로 이용하여 조성하였습니다. 석성은 골짜기쪽은 내외벽 모두 돌을 쌓아 만들고, 경사면은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외벽 의 돌과 맞물리도록 돌을 보강한 후 흙을 쌓아 축조하였습니다.
백제 왕궁지는 공산성 내 서쪽 정상부의 ‘쌍수정’ 앞 평탄지에 자리합니다. 이곳에서는 공주시가지와 백제왕릉군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한눈에 바라다 보입니다. 조사를 통해 벽주건물지(도랑을 파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점토로 벽을 발라서 만든 건물지)와 굴립주건물지(기둥의 밑동을 땅 속에 박아 세운 건물지) 를 비롯하여 연못, 나무창고와 같은 저장시설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출토유물로는 지붕 처마끝을 장식한 수막새, 청동거울, 금동제 향합, 토지등이 있는데, 특히 연꽃무늬 수막새의 존재를 통해 품격이 높은 건물이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성 서북쪽으로 금강에 연한 넓은 대지에 자리하며,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골짜기인 지형을 대규모 토목 공사로 평탄하게 만든 후, 남북과 동서방향으로 구획된 도로를 중심으로 축대를 쌓아 계단식의 대지를 만들고, 규칙적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사를 통해 약 80여동의 건물지를 비롯하여 도로, 배수로, 저수시설, 연못, 나무창고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저수시설에서는 옻칠갑옷과 말갑옷, 장식칼, 큰칼, 중국제자기, 목기, 쌀, 조개, 밥 등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옻칠갑옷은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두껍게 옻칠을 한 것으로, 붉은색으로 ‘貞觀十九年(정관십구년)’ (645년. 의자왕 5년)을 비롯한 명문이 확인되어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큽니다.
공산성에는 위와 같은 백제시대의 유산 외에도 4방의 문터, 암문, 고대 등 방어시설과 쌍수정, 영은사, 연못, 중군영지, 28칸 건물지 등 통일신라 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많은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산성의 이름 또한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마성,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공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이름과 문화유산의 존재는 공산성이 오랜시간 지역 거점으로서 역동적으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공주시청 홈페이지 참조)
▼ 공산성 매표소. 입장료는 3천원이다. ▼
▼ 공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서문 금서루(錦西樓) 일대 파노라마. ▼
▼ 금서루 입구 비석군(錦西樓 入口 碑石群) :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새불망비, 유매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 금서루에 올라, ▼
▼ 시계 방향으로 성벽길을 모두 돌아 보기로 한다. ▼
▼ 금강교와 백제큰다리, 그 너머 연미산. ▼
▼ 공사가 진행중인 공산정의 모습. ▼
- 공산정(公山亭) : 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교 (등록문화재 재232호)등 공주의 전경을 한누에 전망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落照)와 야경(夜警)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누각의 명칭은 유신대(維新臺), 전망대 등으로 불려오다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공산정이라 지어졌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공산성의 북문 공북루. ▼
▼ 공산성 냉장고. ▼
▼ 공산성 연못(公山城 蓮池) : 백제가 (475)년에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직후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 연못이다. 1985~1986년에 걸친 왕궁터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연못 안에서는 연꽃무늬 만(卍)자 무늬 막새기와,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나왔다.
연못은 대접 모양으로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윗부분 지름이 7.3m, 바닥 지름이 4.78, 깊이는 3m에 이른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 영은사(靈隱寺) : 1458년(세조 4) 세조가 명하여 창건되었다. 처음 사찰 이름은 묘은사(妙隱寺)이었으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영은사에서 피신한 뒤 은적사로 바꾸었다. 1616년(광해군 8) 영은사에 승장(僧長)을 두어 전국 8도의 사찰을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승병 합숙 훈련소로 쓰였는데, 영규대사가 일으킨 승병들이 이곳에서 조련을 받고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현재 절에 전하는 탑 부재(部材) 등의 양식으로 보아 영은사가 고려시대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은사는 공주 공산성 내 금강을 접하고 있는 북쪽 끝의 계곡에 있다. 공주 공산성은 성 둘레가 2,450m에 이르는 산성으로, 공주 공산성에 자리 잡은 영은사에서는 공주시의 전경은 물론 금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사역(寺域)은 금당(金堂) 격인 원통전과 강당 격인 영은사 관일루, 요사채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원통전 앞에 영은사 관일루가 배치되어 있다. 사역은 규모가 크게 줄었으며, 사세 또한 미약한 편이다. 비구니의 수도처로 이용되고 있다.(디지털공주문화대전 참조) ▼
▼ 이건 뭐, 남한산성을 연상케 하는 완전한(?) 산행이다. ▼
▼ 광복루가 오늘의 가장 높은 지점이다.
자그마치 해발 112.4미터. ▼
▼ 공산성 광복루(公山城 光復樓) :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2층 누락으로, 공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다.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으로 불렀는데, 1946년 4월에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光復)"이란 이름을 붙이게 됨으로써 누각 명칭이 광복루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 공산성 영동루(公山城 迎東樓) :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하부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고, 문옆 양쪽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문지석을 원래 모습대로 찾아내었다.
발굴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 (철종10)에 편찬도니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2층 문루로 복원하였다. 잊혀진 문루의 명칭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라고 지었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 공산성 진남루(公山城 鎭南樓) :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정으로 다시 쌓으면서 세운 문루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쳐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높은 축대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 백제 왕궁터 주변은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
▼ 추정 왕궁지(推定 王宮址) :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10칸·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 및 저장시설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건물이 있엇던 것으로 추정된다.(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안내판 참조) ▼
▼ 성벽을 따라 한 바퀴, 금서루로 돌아왔다. ▼
▼ 어느덧 석양빛이 사위를 물들이고, ▼
▼ 주차장으로 돌아와 여유로운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향한다. ▼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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