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이 름 : 주암산 (舟岩山, 200대명산 194번째), 최정산(最頂山)
2. 위 치 : 대구광역시 달성군
3. 높 이 : 846미터
4. 산행일시 : 2019. 6. 22(토) 10:50-15:40 (4시간50분, 순수산행시간 4시간 이내)
5. 산행거리 : 9.5Km
6. 산행코스 : 광덕사 → 흔들바위 → 주암산 정상(배바위) → 최정산 정상 → 운흥사 → 오2리(신오교)
7. 동행자 : 엠티산악회 34명
- 남은 200대명산중에 주암산만큼은 산악회를 따라 길게 걸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천 부근 산악회에서는 절대 기회를 찾을 수 없을 것이고... 부득불 서울에서 출발하는 산악회를 물색하게 되었다.
버스경유지까지 오가는 번거로움 때문에 몇 년 전부터 검토만 했던 서울 출발 산악회와의 동행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새벽시간에 신사역까지 이동하는 일은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역시 우려했던 그대로 귀갓길이 문제였다. 토요일 밤의 북적이는 강남 도심으로 들어가서 다시 인천까지 귀가하려니 필경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다.
- 오늘 주암산은 블로그로만 소통했던 솔방울님과의 첫번째 동행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모처럼 쾌청한 날씨에 반가운 만남까지 더해져 遊山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거니와 주암산과 최정산의 등로 상태도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어서 길거리에서 낭비한 서너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 주암산은 앞산과 비슬산으로 대표되는 대구 남쪽 산군의 동쪽 부분을 차지한다. 가창댐이 있는 용계천과 냉천이 산자락의 북동쪽을 감싸며 흐르고, 정상에서 남서로 뻗은 산줄기는 최정산을 지나 비슬산, 청룡산 앞산으로 이어지며 거대한 산지를 이룬다. 주암산 산행은 허브힐즈 오른쪽 안양사나 광덕사 뒤 능선을 따라 오른다. 동쪽 자락의 주암산수양관, 또는 동남쪽 원장마을에서 원티골을 따라 오르는 길이 일반적이다. 어느 곳을 들머리로 삼든지 산행은 3~4시간이면 충분하다. 주암산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이 섞여 자라 혼합림을 이루고, 1천여 종의 자생식물이 자라며, 정상 일대와 능선에는 억새풀이 무성하고, 봄에는 진달래 천국을 이루고, 가을에는 단풍이 온 산을 물들여 대구 근교지방의 주민들에게는 매우 친근한 산이다. 최정산과 주암산은 능선상으로 바로 이웃하여 있어 두 산을 종주하는 것도 좋다.(산림청 자료 참조)
- 주암산의 지명 유래에 대하여 아무런 자료를 못 찾아서 계속 살펴 보던 중 의외의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래 전국의 산을 다니면서 감춰진 역사적 스토리텔링이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문화인류학적 삶의 서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가는 나름의 공부(?)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건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가창골 학살", "가창대학살"로 알려진 이승만정권의 최대 민간인학살 사건이 그것이다. 광복후 이승만 일당이 100만명 이상의 국민을 참살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지 오래지만 TK의 심장부 대구에서 벌어진 가창골 학살 사건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현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 그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TK(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의 맹목적, 수구적 정치편향이야말로 어쩌면 끔찍한 역사의 배반과 강요된 레드컴플렉스에서 비롯된 불신과 공포에 의한 무의식적, 본능적 자기부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삼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7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은폐, 왜곡되어 청산되지 못한 비참한 야만의 역사적 현장으로 남은 주암산 일대는 너무도 무심하고 천연덕스럽게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 산행 들머리는 광덕사 주차장이다. ▼
▼ 현수막 뒤쪽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
▼ 느긋하게 출발하였더니 솔방울님 일행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
▼ 그저 급경사 오르막이 펼쳐지는 줄 알았는데 가끔 숨돌릴 수 있는 오솔길도 나타난다. ▼
▼ 다시 가파른 길이 시작되고. ▼
▼ 짧은 내리막도 지난다. ▼
▼ 저 위에서 쉬고 있던 솔방울님에게 포도즙을 얻어 먹으며 한숨 돌린다. ▼
▼ 당겨 본 대구 수성구 일대.
그 너머 멀리는 팔공산 자락인지? ▼
▼ 금새 기가 막힌 조망터가 나타난다.
가운데 뾰족한 것이 청룡산인가 보다.
최근 몇 달간 이렇게 시야가 맑은 날도 처음인데다 시원한 바람까지 솔솔 불어 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
▼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시산혈해의 끔찍한 역사가 숨어 있었으니...
사실 왼쪽 산마루 너머 가까운 경산시에도 방치된 코발트광산 학살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
▼ 잠시 땀을 쏟고 나면 흔들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뒤쪽으로 돌아가면 기가 막힌 자연 전망대가 나타난다. ▼
▼ 산성산 너머 앞산까지 대구를 둘러싼 산자락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 일대, 가창댐이 덮어버린 고즈넉한 풍경이 바로 가창대학살의 현장이다. ▼
[보도연맹 학살사건(保導聯盟虐殺事件)]- 6.25 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서 6.25 전쟁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이 사건은 정부가 죄 없는 민간인까지 단순히 보도연맹이라는 집단 내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인, 한국전쟁 당시에 발생한 끔찍한 학살이자 전쟁 범죄다. 연구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만에서 최대 1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 약칭은 보련)은 남한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다. 이 단체는 친(親)대한민국, 반(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좌익 용의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가입시켰다. 실적을 쌓기 위해 쌀과 식량, 비료와 고무신을 준다고 유혹한 공무원들의 선전에 속거나 반(半)강제적 가입 협박으로 수많은 양민과 중고교생까지 연맹원이 되었다. 면책 약속과 달리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과 체벌에 의한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유명한 인사들로는, 코주부 삼국지로 유명한 일러스트가 김용환 선생, 《삼대》의 작가 염상섭, 《카인의 후예》와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시인 정지용 등이 있다.
-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이들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 것을 우려했고 실제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일부 배신행위가 보고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서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갔던 이승만은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한다.
▼ 피카소가 1951년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
[남한 최대의 민간인 학살터 가창골]
- 6월 하순부터 전국적으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의 후퇴와 함께 이뤄졌다. 처음에는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학살이 있었고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대구 이남 지역)과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너무 끔찍하고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가장 피해가 큰 곳은 경상도였다. 경상도는 낙동강 방어선 안쪽에 위치하여 '북한군에 아직 점령되지 않고, 확보해두고 있는 남부 지역'이었기에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의 광기로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결처분하였다.
-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 수천 명을 학살하였고 경산 지역의 코발트 광산에서는 약 3천 5백 명을 집단 학살한 뒤에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
- 독립운동가를 죽인 친일파들..그것이 알고 싶다, 보도연맹 추적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kimlove1&logNo=221540094531
http://blog.daum.net/dolt0914/1209
https://ebackman.tistory.com/576
(기타 관련자료가 인터넷에 많이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 당겨본 오리1리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 ▼
▼ 어느덧 길은 유순해졌다.
평탄한 구간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다. ▼
▼ 가창호 방면은 볼수록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
▼ 저렇게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비참했던 현대사를 반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창골 일대에서 1만명 가량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가창댐의 완공과 함께 모든 것이 수몰되는 바람에 유해발굴 작업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
[가창골 학살 그 이후]
-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후 전국에서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가 들끓어오른다. 장면 정부가 나서고 제4대 국회(제2공화국)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 학살 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이고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 그리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터진다. 모든 상황은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쿠데타 한 달 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학살당한 혈육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까지 모두 '빨갱이'가 되었다. '혁명재판'은 유족들을 잡아 들이고 처벌하였다. 유족회 활동은 금지되었고 그들에게는 연좌제가 적용된다. 모든 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은 요시찰대상으로 감시받거나 실형이 선고되었다.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은 모조리 소각, 폐기되었다. 사건의 진상은 철저히 은폐되어 '보도연맹'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40여년간 역대 군사정권 내내 유지되었다.
-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러 국가적 진상규명 활동과 대통령 사과가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상조사 및 유해발굴, 피해보상을 권유하였고 일부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되었다.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대법원의 확정판결도 나왔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상황은 다시 종료되었다.
- 1950년 7월 대학살 이후 몇 달 동안 수km 떨어진 대구 시내까지 핏물이 흘러 내렸다고 한다. 1959년 가창댐이 만들어져 수천 내지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유해는 모두 수몰되었다. 가창댐은 이승만 정부가 가창골 대학살의 흔적을 영구히 지워 버리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가창댐의 건설로 가창호수가 형성되었다. 지금 가창호의 물은 대구시민이 먹고 마시는 중요한 식수공급원이 되고 있다.
▼ 평탄하고 시원한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
▼ 한 발 앞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솔방울님 일행. ▼
▼ 저 언덕 위에 널찍한 평상이 있어서 점심을 먹는다.
솔방울님 덕분에 부침개를 안주삼아 소주 한 컵을 마셨다. ▼
▼ 주암이 배바위의 다른 말이니 여기가 주암산 정상이다. ▼
▼ 시원하게 조망이 열려서 270도에 가까운 파노라마를 완성하였다. ▼
▼ 경산시 방향 그림.
저쪽 어딘가 인터불고경산 골프장 옆에 사실상 방치된 코발트광산이 있을 것이다. ▼
▼ 멀리 영남알프스의 산군들이 아스라하다. ▼
▼ 오른쪽에 최정산 정상의 군부대 시설물이 보인다.
이렇게 파란 하늘을 얼마만에 본 것인지. ▼
▼ 가야 할 길. ▼
▼ 정상 주변에 움막들이 자주 보인다.
선답자들은 찬송가 소리를 많이 들었다는데 오늘은 조용하기만 하다.
무속인들이라면 주암산의 기(氣)를 받으려나보다 할텐데 기독교인들이 왜 산마루에 기도처를 만든 것인지 어리둥절해진다. ▼
▼ 삼각점이 있는 여기를 진짜 주암산 정상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주암(舟岩, 배바위)의 명칭으로 보나 조망터를 보더라도 1, 2m 높이에 연연하여 너무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 편안한 숲길이 길게 이어지는데..
솔방울님 일행은 어느샌가 멀리 사라져 버렸다. ▼
▼ 최정산까지는 제법 지루한 길.
약간의 오르내림은 있지만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오솔길이다.
저 앞의 후미 일행 두 분을 추월하여 혼자 걷기 시작한다.
너무 빨리 내려갈 필요는 없지만 꼴찌는 또 곤란하지 않겠는가. ▼
▼ 시원한 숲길에서 조금 속도를 내며 걷다 보니 나뭇잎 사이로 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
▼ 부대 입구 포장도로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왼쪽으로부터 차가 오를 수 있는 길이다. ▼
▼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정보를 올리기 위해 찍었다.
정말이다. ▼
▼ 무슨 꽃밭인지는 잘 모르겠고. ▼
▼ 최정산 정상 역할을 한다는 헬기장에 도착했다. ▼
▼ 오른쪽에는 운흥사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있다. ▼
▼ 차량 너머 좌측으로 내려가면 운흥사로 하산하는 길이다. ▼
▼ 최정산의 진짜 정상 부근을 눈으로 더듬자니 자동차 한 대가 씽 올라온다.
차가 오를 수 있는 꼭대기라니.. 뭔가 김새는 느낌에 잠시 째려 보았다. ▼
▼ 하산 시작.
어찌하다 보니 적막강산을 홀로 걷고 있다.
처음 따라온 이 산악회도 말로는 여유를 부리더니 모두가 바람처럼 달려 내려간 모양이다. ▼
▼ 하산길이 엄청 불편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훌륭하다.
괜히 겁먹고 1호(?) 등산화를 신고 왔네.. ▼
▼ 하산길에 눈길을 끄는 건 산수국이다.
산속에서 산수국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아서 보이기만 하면 늘 사진을 찍곤 했는데 이 구간은 온통 군락을 이루고 있다. ▼
▼ 계속해서 산수국이 나타나고. ▼
▼ 하도 많이 나타나니 그중 가장 이쁜 놈을 모델로 삼았다. ▼
▼ 산수국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걸?!!
너.... 그렇게 쉬운 놈이었냐?. ▼
▼ 돌로 뒤덮인 넓은 길이 나타나면 운흥사가 가까워진 신호이다. ▼
▼ 왼쪽 아래로 운흥사가 보이고. ▼
▼ 아스팔트길로 내려와 뒤돌아 본다.
왼쪽이 내려온 길, 오른쪽은 운흥사 가는 길이다.
운흥사가 멀지는 않지만 절집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패스. ▼
▼ 다리를 건너며 올려다 본 최정산 정상.
계곡물이 바짝 말라 있어 큰비가 내리긴 해야 할 모양이다. ▼
▼ 그럭저럭 앞서가던 솔방울님 일행도 따라 잡았다. ▼
▼ 뒤돌아 본 산자락과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르고. ▼
▼ 큰길가에 세워진 우리 버스를 발견한다.
버스 앞 시원한 정자에 앉아 남은 음식과 술을 모두 배 속으로 털어 넣었다.
예정보다 일찍 출발한다는 산행리더의 결정으로 솔방울님과 뒷풀이를 못한 것은 작은 아쉬움이다.
대동식당 어탕국수가 그럴듯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하산식없는 산악회는 나로서는 뭔가 빼먹은 것처럼 서운한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
'산림청200대명산(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6.경북 칠곡 유학산(839m) 빗속에 몸을 감춘 신비(?)의 명산(2019.8.16) (0) | 2019.08.19 |
---|---|
195.충남 금산 선야봉(758m) 신선이 풀무질하던 금산의 숨은 명산(2019.6.28) (0) | 2019.07.03 |
193.경북 청도 화악산(932m) 끄무레한 날의 왠지 억울한 산행(2019.6.6) (0) | 2019.06.13 |
192.경북 경주 단석산(827m) 김유신과 화랑 전설의 무대 신선사 마애불상군(2019.6.6) (0) | 2019.06.11 |
[200대명산]191.강원 인제 개인산(1,342m) 최초의 산행 포기!!? 길없는 원시림(2019.5.25) (0) | 2019.05.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