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이 름 : 가산 (架山, 숨겨진우리산/200대명산 154번째)
2. 위 치 : 경상북도 칠곡군
3. 높 이 : 902미터
4. 산행일시 : 2017. 3. 5(일) 09:50-13:50 (4시간, 순수산행시간 3시간)
5. 산행거리 : 9.5Km
6. 산행코스 : 진남문 → 임도 → 동문 → 가산 정상 → 중문 → 가산바위 → 남포루 → 진남문 주차장
7. 동행자 : 조은산악회 38명
▼ GPS 기록용 단말기의 배터리가 일찍 떨어지는 바람에 궤적이 중간에 끊겼다. 실제는 원점회귀 산행. ▼
- 대구의 명산 팔공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가산은 일명 칠봉산이라고도 불리며 칠곡군 내 최고봉으로 가산면 가산리에 있다.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칠곡(漆谷)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에 가산성을 쌓고 칠곡도호부의 치소가 약 180년간 산성 내에 있었다.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로서 선조의 호국의지가 깃들어 있는 가산산성과 가산바위 등 명소가 많으며 울창한 수림, 계곡의 석간수는 한여름에도 서늘함을 느낄 만큼 시원하여 가족 단위의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다.
가산바위는 산성 서쪽에 있는 80여평의 넓은 바위로, 신라시대의 고승 도선(道詵, 827∼898년)이 산천을 편력하면서 가산바위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를 눌렀다고 전한다. 용의 모습을 닮은 용바위, 신선이 노닐었다는 유선대는 가산 정상에 우뚝 솟아 있다.(산림청 자료 참조)
- 본래 인근의 유학산과 함께 세트로 묶어 하루에 해치우려던 산. 가산 산행을 앞두고 자료를 찾아 보다 가산산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역사의 무대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산성이 조금은 뜬금없어 보여 축성 내력을 살펴 보았다.
- 가산산성은 경상도관찰사 이명웅(李命雄)[1590~1642]의 상주로 지어졌다. 이미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을 겪고 난 이후인 1640년으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으니 우선 시기부터 잘못 되었다 할 것이다. 인근 장정 10만 여명을 징발하여 불과 8개월만에 내성을 쌓았다 하니 백성들의 고통은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속출하고 원성이 자자하여 이명웅은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가뜩이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으로 힘겨웠을 민초들이 공명심에 사로잡힌 벼슬아치 한 명의 무리한 신념에 의해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렸던 것이다. 광해군을 내쫓고 망해가는 명나라에 사대하여 병란을 자초하고 온갖 수모를 겪은 무능한 조선의 지배세력들이 절치부심하여 생각해 낸 대책이 겨우 산성쌓기였다는 사실도 혀를 차게 만드는 일이다.
- 가산산성은 이후 10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내성, 외성, 중성이 모두 완공되었지만 결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산성으로서의 효용을 발휘하지 못 한 채 고작 6.25 전쟁의 작은 무대로서만 기억되고 있다. 게다가 도호부를 해발 800m대의 산성 내에 설치하였으니 이를테면 구청 한번 가려면 북한산 정상을 올라야 하는 한심한 광경이 1816년까지 이어진다. 해당 지역에 사는 이들이야 기왕 지어진 산성터를 관광명소로 활용하고 싶겠지만(실제 그렇게 활용되고 있다.) 그 무너진 성터의 수많은 바위 덩어리들이야말로 역사의 뒤안길에서 신음소리 한번 못 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십만 민초들의 피와 눈물의 결정체인 것이다.
- 권력을 가진 자들의 허황한 신념과 욕심, 잘못된 결정들이 수많은 국민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웅변하는 역사 교육의 공간으로서 가산산성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도 멀쩡한 강바닥을 뒤집고 물길을 막아 후손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만든 일당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오욕의 역사는 아직도 반복되는 것이다.
-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모두에게 잊혀져 버린 무명인들의 삶을 떠 올릴 때면 씁쓸하게 생각나는 사례가 있다. 산을 다니면서 자주 보게 되었던 "6.25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이 그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진정한 영웅들, 그야말로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의 14만여 유해들이 50년이 넘도록 산자락에 방치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선후배, 동료였고 전우였던, 반공을 위한 국민의 희생과 굴종을 강요하던 군부 독재세력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친 진정한 전쟁영웅들의 시신마저 수습할 의지가 없는 권력자들이 그렇게 피터지게 외치던 반공, 안보 타령은 무엇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들이 말하는 "반공"은 그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무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가.
만시지탄의 "6.25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이야말로 그들에게 평생 빨갱이로 공격받았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새삼 떠올려 본다.
▼ 오늘 산행의 시작과 끝은 진남문 주차장이다. ▼
▼ 진남문. 기록은 가산산성이 17~18세기에 걸쳐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영남 제1관방’의 역할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
▼ 혜원정사의 모습.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
▼ 대구에서 가까운 곳이라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 ▼
▼ 오늘은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 예정이므로 왼쪽으로 향한다. ▼
▼ 이 지점에서 갈등이 생겼다. 아무래도 왼쪽길이 맞는 것 같은데.. 이정표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 고민 끝에 큰 길로 가기로 했다. 결국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다. ▼
▼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지만 이미 내친 발걸음이다. ▼
▼ 유난히 바윗돌이 많다. 부산 장산의 너덜도 연상이 되고..
주변 환경이 이러하니 산성을 쌓으려 했나 보다. ▼
▼ 동문으로 향하는 임도를 지루하게 걷는다.
본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
▼ 가산은 자칭 세계 최대의 복수초 군락지이다.
산악회의 산행 공지에도 오늘은 복수초를 탐방하는 날이라고 했는데.. ▼
▼ 나는 오늘 복수초의 "ㅂ"도 구경하지 못 했다.
아래 사진은 함께 한 산악회 카페에 다른 사람이 올린 것을 퍼 온 것이다.
나중에 들어 보니 낙엽을 들추며 찾아 낸 것이라고 한다. ▼
▼ 복수초를 못 찾은 것은 이름모를 저 등산객들 탓이 크다.
인근에 사는 이들인 것 같은데 군락지 앞에서 작년 이야기를 하며 아직 꽃이 안 피었다고 하길래 그냥 믿은 것이다.
어차피 야생화에 대해서는 큰 애착이 없는 터라 별다른 아쉬움은 없다. ▼
▼ 동문에서 또한번 길을 놓친다.
아무리 이정표를 살펴 봐도 가산 정상가는 표시가 없다.
지금이라도 저 동문 밖으로 걸어 나갔더라면 성벽을 따라 좌측까지 가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이어졌을 것이다. ▼
▼ 하염없이 임도를 따라 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정상가는 길을 물어 보지만 의외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알고 보면 우측 산등성이가 바로 가산 정상이다. ▼
▼ 산성 내부에는 곳곳에 건물터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
▼ 임도 끝의 갈림길에 이르러서도 정상 오르는 표시는 없다.
이 지역에서는 '가산'보다는 '가산산성'이 훨씬 중요한 브랜드인가보다. ▼
▼ 잠시 진탕길을 오르니 낯익은 정상석이 나타났다. ▼
▼ 실제 정상보다 아래쪽에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 곳은 산성의 수장대가 있던 자리.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다. ▼
▼ 이 곳이 가산의 진짜 정상이다. 표석에는 한티재라고 적혀 있다.
갑자기 인적이 사라져서 약간 어리둥절하지만 기가 막힌 조망터를 독차지한 기쁨으로 아예 자리를 잡았다.
소주도 한 잔 마시며 한참을 쉬어 간다. ▼
▼ 오랜만에 파노라마 사진도 찍어 보고.
좌측 너머 희미한 것이 유학산인가? ▼
▼ 치키봉 지나 팔공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긴 성벽길.
이렇게 높은 곳에 성벽길을 쌓기 위해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냥 걸어도 힘든 길을 무거운 바위까지 끌고 올라 왔을 참상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
▼ 팔공산 정상부도 줌으로 당겨 보고. ▼
▼ 어찌 됐든 멋진 조망터임은 분명하다.
하드코어 산객들이 말하는 소위 '가팔환초', 울트라 캡숑 짱 산행코스의 시작점이 바로 이 곳 가산이다. ▼
▼ 반대 방향, 용바위와 유선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
▼ 사람들 앉아 있는 곳이 유선대라는데.. 용바위는 어떤 것인지.?
밑에서 봐야 제대로 그림이 나오는가 보다. ▼
▼ 정상에서 내려 와 가산바위쪽으로 걷다 보니 중문이 나타났다. ▼
▼ 중문을 지나 숲길을 걷다 보니 좌측에 성벽이 보이길래 무조건 치고 올랐다.
가산바위까지 이어지는 멋진 그림이 펼쳐진다. ▼
▼ 가산바위에 올라 한껏 시원한 조망을 즐긴다.
많은 이들이 가산바위 타령을 하는 이유를 비로소 짐작하게 되었다. ▼
▼ 가산바위에서 내려와 잠시 또 헤맨다.
어디를 봐도 진남문 가는 길이 없다.
사진 좌측은 내가 온 길인데...? ▼
▼ 물어봐도 역시 확실하게 알려 주는 사람이 없고...
잠시 숲길을 헤매다가 무조건 성벽길을 따라 가기로 한다. ▼
▼ 이 지점에 와서야 명확하게 길을 이해하게 되었다.
좌측이 중문이요, 우측이 진남문에서 이어진 길이다.
그렇더라도 가산바위 부근에 남포루나 진남문 방향 표시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헤매지는 않았을 것이다. ▼
▼ 이제 길이 확실해졌으니 유유자적 성벽길을 걷는다. ▼
▼ 성벽길이 끝나고.. 암문을 통해 빠져 나간 후 오른쪽으로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
▼ 원래는 이 길로 올라 왔어야 했다.
예상보다 가파른 길이다. 반대로 올라 왔다면 땀깨나 흘려야 했을 것이다. ▼
▼ 이 쪽으로도 성벽의 흔적이 이어진다.
진남문까지 연결된 외성인 것이다.
이 방대한 구간을 오랜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이 맨손으로 바위를 날라 성벽을 쌓았으니 그 원성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하늘의 벌이었을까. 가혹한 노동력 징발로 파직된 이명웅은 2년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 가파른 내리막을 걷다 보니 멀리 진남문이 보인다.
애초에 진남문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올랐어야 했던 것이다.
멀리서 온 외지인들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이정표들이 새삼 아쉬울 뿐이다. ▼
- 늘 그렇듯 식당에서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 귀갓길에 오른다. 비슷한 가격의 식사이지만 지난주 전라도의 상차림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잘 빠지는 고속도로를 따라 8시가 되기 전에 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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