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유람록>(최석기/돌베개)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쓴 지리산 유람록을 우리말로(원문은 한자어로 돼있음) 쉽게 풀어서 소개한 책이다.
우리들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통해 그 시대 역사 배경과 당시 생활풍습, 등산 목적과 이유 등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지리산에 올랐던 방식과 유람기를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하다.
몇 번이고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고 두세 번 지리산 종주도 한 나로서는 그동안 올랐던 산 중에 지리산이 가장
좋았다. 땀 흘려 올라 그만큼 애착이 간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람기를 통해 우리선조들은 지리산을 어떻게 올랐는지
다시 한 번 지리산을 알게 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시절 이야기들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한문을 배운 이들 덕분이다.
무슨 암호처럼 보이는 빼곡한 한자어들을 뜻풀이를 해서 따끈따끈하게 책으로 펴내니
독자들이 쉽게 선인들의 유람기를 읽을 수 있다.
책머리에서 이 책을 옮긴 최석기는 제자들과 함께 뜻을 같이 하여 강독회를 만들고
지역에 관련된 정신문화를 발굴하고 대중에게 소개하기로 해서
첫 번째로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라 한다.
산의 문학을 자료로 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논어]에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긴다"라는 말에 대해 한동안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데,
나는 지리산을 오르내리면서 그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생명체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도록 감싸주고 있다.
그러니 산의 그 덕이 인(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산은 말이 없지만,
어떤 생명체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여 포옹한다.
그 베풂의 미덕이 바로 '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산은 묵언 중에 그 덕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는 비로소 "우리나라의 산이 70% 이상이라는 것,
산이 많다는 것이 고맙게 와 닿았노라고 말한다.
저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산의 미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고
산에 미친 사람들은 많은데도 산을 통해 자아와 인생을 생각하고 인간사회를 통찰하는 작품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점을 아쉬워한다.
글쓴이는
옛 선인들이 산을 유람하고 유람록을 남긴 것을 보면
자아에 대한 심성 수양적 성찰과 역사적 삶을 통해 당대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지리산을 즐겨 찾는 분들이 선인들의 유람록을 통해 산의 의미를 한 차원 높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록을 모두 모아 서너 책 정도로 번역해 묶을 작정이었지만,
문학성이 떨어지는 작품들이(특히 조선후기) 있어 시대별로 분류하지 않고
그 중에 가장 빼어난 작품만을 엄선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된 것이라 한다.
책의 순서는 이륙, 김종직, 남효은, 기일손, 조식, 양대박, 박여량, 유몽인, 성여신 등 차례로 소개한다.
뒤편엔 원문이 실렸으며 부록과 해설의 차례로 구성되어 있다.
맨 마지막 장에 실린 해설은 조선시대 등산문화와 책 전체를 개관하는데 도움이 된다.
해설을 읽고 책을 읽어나가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과 역사의식을 대략 짐작할 수 있고 책을 읽기에도 편하다.
조선시대 양반들 지리산 오른 이유, 현실과의 괴리감 이기기 위해
공통적으로 이 책에서 발견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두류산(지리산)을 등반한 이유는
삶 속에서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 혹은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유람기를 기록한 것과 아울러 유람의 동기와 목적, 동행인을 첫 머리에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유람하면서 견문한 것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끝으로 총평하는 형식을 띈 구체적인 서술체계를 가진 기행문학이라는 점이 그 특징이다.
또한 그들의 유람기는 사물을 깊이 응시하면서 자아성찰과 시대·역사적 상황과 맞물린 사고를 하고 있고
앞날을 내다본다.
이들 거의 모두는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집권세력과 뜻이 맞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불교를 무당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하나의 '사교'로 생각하는 것을 책 전체 흐름에서 볼 수 있다.
그 시대만 해도 두류산(지리산) 정상 주변에는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있는가 하면,
나라에 올릴 '매'를 잡기 위해 바위틈에 기식하며 지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주 오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조건들 때문에 한 번 지리산을 오르면 몇 박 며칠 걸렸고,
그래서인지 주로 영남 사람들이 많고 뚜렷한 동기와 목적이 있었다.
그 당시 선비들이 지리산을 찾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천왕봉을 찾는 사람들과 청학동을 찾는 사람들로 갈라진다.
백두대간의 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우뚝 솟은 천왕봉에 올라 빼어난 산세와 기상을 느껴보는 것과
청학동을 찾아 신선의 세계를 찾아가고 싶은 동경 때문인 듯하다.
청학동을 찾아가는 선비들은 대부분 악대와 기생을 포함해 30-40명 사람들을 대동하는데
술과 음악이 끊이지 않는 유람 목적이다.
반대로 천왕봉을 찾는 선비들은 높은 봉우리의 위용과 기상 등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은 정식으로 등산길에 오를 땐 종 서너 명을 데리고 산을 오르다가 절의 승려를 길잡이로 하기도 한다.
거슬리는 점도 없지 않다.
가령, 가파른 길을 올라가다가 힘들 땐 자기 힘으로 가지 않고 업혀서 가는 선비도 있다.
밧줄로 자기 몸을 묶도록 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해서 힘든 길을 가는 선비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등산준비물들도 눈길을 끈다.
짚신, 나막신, 도롱이, 삿갓, 배로 만든 행전, 솜옷, 지팡이, 쌀, 김치, 간장, 말린 꿩고기, 쌀가루,
홍시, 다래, 베개, 방석, 종이, 벼룩, 붓, 먹, 시집 등이다.
"눈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짚신을 신었었다.
바랑은 오늘의 냅색의 근원이요,
지팡이는 피켈, 행전은 스패츠요,
오바슈즈는 각반이었다"고 ('나는 아무래도 산에 가야 겠다' 중)했던 것이 생각난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보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유람록은 1463년에 창작된 이륙(1438-1498)의 <지리산기>가 최초라 한다.
"구름이 눈 아래 평평히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조선시대 유람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이라 한다.
김종직은 영남 출신으로 두류산은 그의 고향 산이다.
당시 사림의 대표 인물이던 그가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1472년 8월에 유호임, 조위 등과 함께
현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근처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숙밭재-하봉-중봉-천왕봉-향적사-세석평전-영신사-한신계곡-백무동의 코스로 6일 동안 유람하였다 한다.
김종직의 유람록은 유람 동기, 날짜별 기록, 유람 총평으로 이뤄져 있어
후대 사람들의 유산록, 유산기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지리산을 유람한 후 총평하기를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고 하였고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이나 대산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封禪)을 하고
옥첩(玉牒)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라며 지리산을 중국의 명산보다 더 빼어나다고 표현하였다.
'지금은 오직 용렬한 사람, 도망친 종, 신분을 숨기 자, 불법을 배우는 자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도 읽을 수 있다.
또한 두류산에 올라 평소의 소원을 풀기는 했지만
청학동이나 오대사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무오사화 때 35세의 짧은 생을 마쳤던 김일손(1464-1498)은
26세의 젊은 나이에(1489) 일두 정여창과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기행록>을 남겼다.
그는 학관으로 있을 때 병을 핑계 삼아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놀고 싶은 뜻을 이루었지만
두류산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고 한다.
두류산을 마음에 담고 있기만 했던 그는
어느 날 드디어 두류산을 유람하게 되었고 두류산(지리산) 정상에 오른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반평생 동안 운기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을 뿐, 그것이 허공에 있는 물건인 줄 몰았다.
여기 올라와보니 구름이 눈 아래 평평히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구름이 평평히 깔린 곳은 그 아래가 대낮인데도 반드시 그늘이 드리웠을 것이다."
그는 또 "이번 산행을 하면서 처음에는 발걸음이 무거운 듯 하더니
날이 거듭될수록 두 다리가 점점 가뿐해짐을 느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일이 습관들이기 나름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의병활동에 헌신하다가
과로로 1592년 7월 저주에서 세상을 떠난 양대박(1543-1592)은 지리산에 일찍이 올랐던가 보다.
23세에 지리산 천왕봉에, 30세엔 금강산을 유람하였고 지리산은 총 네 번이나 올랐다.
'지리산을 다시 유람하게 되었다'고 첫 문장이 시작되는데
그동안 지리산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단박에 드러난다.
"봄에 꽃 피고 가을에 낙엽 질 때마다 내 마음이 그곳(지리산)에 가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산이 바다를 삼킬 듯이 웅장하고 천지간에 우뚝 서 있어서
신선들과 고승들이 모여 살기 때문이리라"며 지리산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낸다.
비로소 지리산 정상에 오른 양대박은 "봉우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찌 이 봉우리가 높은 줄 알겠는가?
저 넓은 바다를 보지 않았다면 저 바다가 저리 큰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제야 지위가 높으면 소견도 커진다는 말을 바야흐로 믿게 되었네.
그렇지만 상봉을 우러러보니 태연히 우뚝하게 솟아 있구려." 하고 말한다.
그는 또, "단풍잎을 감상하고 일출을 본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오춘간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청터옹과 함께 하고,
웃음을 선사한 양광조와 함께 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
이 세 사람은 천하에서 구하려고 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라며
마음 맞는 벗과 함께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는 또 "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겨우 열흘이었다.
지나면서 귀로 들을 만하고 눈으로 볼 만한 것을 오춘간이 빠짐없이 모두 묶어서 일록(日錄)을 만들었다"며
기록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산과 바다의 위대한 경관과 유람의 지극한 즐거움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군더더기 같은 내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내가 늙어서 문을 닫고 명상에 잠기는 날,
아이들에게 읽게 하고 한석에 기대어 듣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을 나서지 않고도 강산이 다 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유람록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내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니, 얻은 바가 어찌 많다고 할 수 있겠는가?
높은 산과 큰 바다 같은 골짜기와 괴이한 바위 같은 것들은 아무리 종이와 붓이 많더라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박여량(1544-1611)은, 지리산을 세 번 유람하였다.
그는 산을 유람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는 박명부, 정경운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산일록>을 남겼다.
유몽인은 지리산에 올라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라고 감탄하였다.
또 그는 "문장에 비유하면 굴원의 글은 애처롭고 이사의 글은 웅장하고,
가의의 글은 분명하고 사마상여의의 글은 풍부하고 자운의 글은 혐묘한데
사마천의 글이 이를 모두 겸비한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조선전기의 유람록 작가층이 주로 영남측 사림출신들이다.
작품 속에서 이들이 처한 입장과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이 표출되어 있다.
이들의 지리산 유람록은 다음 시대에 창조된 조식의 <유두류록>과 함께
후대 지리산 유람의 전범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은 등산문화가 급발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
그저 산에 가다가 중간쯤에서 도시락 까먹고 흥에 겨워 놀다가 오는 사람도 있고
급히 올랐다가 급히 내려오기 바빠 정작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산을 가는 횟수만 늘어나는 산객들도 많다.
산행기를 기록하는 것은 또 얼마나 될까.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그들의 삶이 엿보이는
'선조들의 지리산 유람록'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유익하다 생각된다.
유산기(산행기)를 왜 써야할 지 그것을 알 수 있으리.
어젠(7일) 무척 청명한 날씨더니 오늘은 흐리고 비마저 흩뿌린다.
맑은 날엔 가깝고 먼 산마루가 또렷하게 보여 내 눈길은 산 능선을 타고 넘기도 했는데
오늘은 안개가 지워버렸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고 덮으며 나는 내 발길 숱하게(?)닿았던 지리산으로 다시 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리산과 더 깊이 더 오래 교감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문을 나서지 않고도 강산이 다 내 눈에 들어오게 할 그때를 위해
발로 밟아 기록한 산행기에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지리산과의 만남을 남기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저자:최석기 외 옮김
출판:돌베개
값:15,000원
이명화 기자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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