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정보 자료실

[펌] 조선시대 유산기 소개

by 日新우일신 2010. 10. 30.
728x90

유산기 콘텐츠조선시대 유산기 소개
조선시대 유산기 소개
조선시대 유산기에 관해/박원식(월간 [사람과 山] 편집위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Main.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cp0535


등산(登山)이라는 종목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는 산을 처음 고안한 조물주는 누구였나를 묻는 것처럼 싱겁거나 벅찬 질문이다. 등산의 발생 연원을 단정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저 아득한 과거로부터 사람들은 산을 애용했다. 창으로 짐승을 꿰는 성과를 거두어야만 했던 수렵 시대의 선인들에게 산은 생존의 사냥터였다. 자신이 사는 마을의 지형을 숙지하거나 이웃 마을의 동향을 탐색하기 위해 산에 오르기도 했다. 기상을 관측하고 별의 음성을 좀 더 귀 기울여 듣기 위해 산행에 임하기도 했다.

 

이렇게 고대의 등산은 스포츠나 레저 활동으로 정착한 오늘날의 등산과 그 의미가 크게 달랐다. 고대인들이 몹시 높은 산을 기어이 올라야만 했던 가장 긴박한 이유는 아무래도 종교적 동기에 기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의 신령을 숭배한 나머지 입산 자체를 터부로 여기는 미신도 있었지만 용감한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정말 신령이 거주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혹은 제단을 쌓기 위해 정상을 밟았다. 기록으로 전달된 몇몇 소식들을 보더라도 저 옛날의 산은 신성(神聖)과 동격인 한편 신앙적 활동의 한 무대였다. 기독교 성서에 따르면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랐으며, 예수는 올리브산에 올랐다는 게 아닌가.

 

고대로부터 매우 견고한 숭천숭산(崇天崇山) 사상을 지녀왔던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태백산(太伯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으로 진급한 웅녀(熊女)와 환웅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의 출생 신화는 산악 숭배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숭산 사상에 깊이 사로잡혔던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산을 신앙적 문화적 토대로 여겼던 사실들은 <삼국사기>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등산의 역사적 연원이 고대로까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애니미즘의 총화이자 상징인 산을 향한 선인들의 발길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한결 잦아지게 되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한 등산도 빈번해졌다.

 

그렇다면 순수한 등산의 효시는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이를 뭐라 딱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신라 시대 화랑도의 유산(遊山)을 등산의 원조로 간주하며, 혹자는 불교 수행자들의 입산을 그 효시로 여기기도 한다. 아무튼 이 나라에서 등산이라 일컬을만한 행위는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선 더욱 활발해졌다. 군사적 정치적 학술적 성격의 산행이 수시로 이루어졌으며, 문인 사대부들에 의한 유람적 성격의 등산도 일상화되었다. 조선 중엽의 민화 중엔 밧줄을 타고 암벽을 오르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고전적 암벽 등반인지는 확증되지 않고 있지만 조선의 세월 속에서 일련의 등산사적 전개가 완연했음을 알게 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때에 벌어진 등산의 양상과 의미를 알게 하는 한결 분명한 재료는 역시 유산기(遊山記)다.

조선의 선인들이 산을 누리는 방식에는 대충 세 가지의 코드가 있었다. 관산(觀山)·요산(樂山)·유산(遊山)이 바로 그것들이다. 유산기란 이 중에 유산의 방식을 영위한 이들이 남긴 기록으로 이 안에 관산과 요산의 이념이 화학적 합성처럼 충분히 용해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유산기는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유산의 기록, 즉 산을 노닌 체험을 글로 적은 기행 산문이다. 이 유산기는 '유기(遊記)'라는 장르의 하위로 분류할 수 있다. 유기에는 산을 대상으로 한 유산기 외에 강물·호수·사찰 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기'라는 이름으로 생산된 기행 산문은 이미 고려 때에 등장해 1243년에 쓰여진 진정국사(眞靜國師)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그 원형으로 꼽지만 유산기가 현저하게 개화한 것은 역시 조선조에 들어서면서였다. 특히 조선 중기인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집중적으로 쓰여졌다. 아무튼 유산기는 조선이 남긴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문학적 정신사적 의의를 동시에 지니는 선인들의 고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산기는 지하 유물 창고에 거주하는 따분한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총 5백 60 여 편에 이른다는 조선 시대 유산기의 대부분이 한자 문장의 두터운 갑옷 속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산기의 한글 번역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되어 왔었는데 이제 본 사이트에 2백 여 편의 유산기가 드디어 한글의 옷을 입고 데뷔하게 되었다. 저 한자문화 시대에 태어난 유산기들이 마침내 21세기의 사이버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를 일컬어 쾌거라 해야 하는가.

 

 

유산기, 산 사랑의 그 겸손한 고백록

그나저나 조선조 사대부들은 왜 유산기를 썼을까. 유산기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의 선비들이 산에 오른 이유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녔던 산수관을 이해할 때 풀릴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조선의 선인들의 산수관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양상이 다소 다르게 전개되었다. 조선 초기엔 산수를 하나의 우주로 인식하는 거시적 신비적 자연관이 우세했다. 산의 형상과 지세를 살펴 그 안에 흐르는 기(氣)를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인문지리가 유행했던 것이다. 중·후기로 접어들면서는 자연을 한결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 고조되고 심화된 성리학의 영향으로 합리적인 자연관이 파생하게 되는데 이에 힘입어 자연지리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어쨌든 조선의 선인들에게 산은 매우 긴밀한 일상의 형제였다. 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산에서 찾고자 했으며, 풍류와 방랑의 매개로 알아 기꺼이 등산에 임했다. 유교적 이념이 제시하는 이상 세계의 구현을 위한 학습의 도장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즐겨 산과 교제했다. 수시로 등산을 했다. 산과 정을 통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오늘날과 달리 조선 시대에 산에 오른다함은 몹시 수고스러운 여정일 수밖에 없었다. 교통도 열악하고 맹수가 생육하는 등산길은 거칠고 사나웠다. 하지만 선인들은 백두산 정상이며 지리산 꼭대기를 잘도 올랐다. 마치 수행을 하듯이 명산들을 두루두루 섭렵했다. 이 용감하고도 모험에 찬 등산이 그토록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산을 예배하고 관조하는 유교적 자연관이 선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무르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을 오른 뒤의 참지 못할 감흥으로 토해진 문장들의 덩어리인 유산기는 이와 같은 조선 시대 선인들의 산 사랑에 관한 겸손하고도 정중한 고백록이다. 산 사랑을 통한 영감으로 사적 도락(道樂)을 영위하고 나아가 시대적 공리적 정도(正道)의 지평을 모색한 기록물이다.

 

유산기의 내용은 작자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일련의 공통점을 드러낸다. 유산기의 양식적 구성은 대체로 유산의 준비에서 시작해 유산의 실행과정을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유산에 대한 총평을 정리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양식적 바탕 안에 실린 내용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산을 오르는 과정의 고난과 보람에 관한 감회, 산행이 야기하는 도저한 풍류, 산수 경관에 대한 정밀한 묘사, 산이 보유한 명승·고적·설화에 대한 면밀한 보고, 산사에 머물며 산승들과 나눈 대화, 동행한 사람들과의 일화, 산을 누비는 도중에 문득 깨닫게 되는 도(道)에 관한 고백 등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산의 품에 들어 산과 사교하는 도중에 발생하는 모든 즉흥적 내면적 고백과 아울러 산에 거주하는 문화 유산들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적 문화적 해석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풍류, 도, 그리고 인간

그렇다면 조선의 유산기들에 나타나는 선인들의 산수관은 어떤 것일까. 유산기는 조선 사대부들이 지녔던 산에 관한 인식을 완연하고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첫째, 조선의 선인들은 산을 풍류의 장소로 인식했다.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산은 은둔과 둔세(遁世)의 의지처이면서 현실의 고달픔을 치유할 수 있는 요양소이기도 했다. 산에서 누릴 수 있는 풍류로 영혼의 보약을 삼았던 것이다. 모든 유산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발랄하고도 섬세한 자연 묘사는 몹시 감흥에 찬 것인데, 이는 입산 행위 그 자체가 풍류의 동의어로 다가오는 내면 심리의 민감한 표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예리하고 화려한 경관 묘사로 표출된 유산기 작자의 유락(遊樂)은 점차 도저한 시흥(詩興)으로 발전하고 심지어 가무(歌舞)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산을 문학의 산실이자 풍류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유산을 하면서 실로 야무지고 뻑적지근한 풍류를 즐긴 인물은 주세붕이었다. 주세붕은 기생과 피리쟁이, 노래하는 재인, 거문고와 아쟁을 타는 여종까지 대동하고 산에 올라 밴드들이 연주하는 악곡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어댄 자신의 유산 양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둘째, 조선의 선인들은 산을 도(道)의 비밀이 깃들인 공간으로 인식했다. 산행을 통해 도심(道心)을 기를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산은 일종의 정신적 교사였으며 선인들은 등산을 통해 심신을 수양했다. 이는 유산기 작자들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생의 근본 도리로 아는 성리학자들이라는 사실과 긴밀한 관련을 가진다. 그들은 황홀한 자연 경물에 대한 묘사나 풍류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산이 들려주는 신성한 묵시에 귀기울이는 겸허한 자신의 심회를 적극적으로 술회했다. 퇴계 이황은 구도자다운 영감을 가지고 자연이 드러내는 조화로운 자취를 진술하는 일에 매우 탁월했다. 지리산을 무려 열일곱 번이나 등산했던 남명 조식의 유산록을 보면 그가 등산의 노정마다 도심을 기르는 문제를 환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율곡 이이는 산수를 즐기는 도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산에 담긴 도를 아는 것이 가장 수준 높은 경지라고 했다. 이렇게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산은 도의 센터이자 심신을 수양하는 아카데미였다.

 

셋째, 유산기에 나타나는 조선의 산은 인간의 장소였다. 도의 궁극적 비밀이 깃들인 신성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산은 신의 거처는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신령이 거주한다고 숭배되었고, 불교가 유입된 이후엔 산자락 곳곳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산 자체를 불국토(佛國土)로 인식하는 경향이 분명했지만 유교적 이데아 속에서 탕탕 행진했던 조선조의 산은 그 의미가 크게 달랐다. 불교적 신비적 의미가 약화되고 유교적 가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과 만물의 시원이 되는 근원적 공간으로서의 산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한편, 성리학적 실용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은 인간사의 영욕이 얼룩진 삶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사람의 삶이 피고 진 역사의 현장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조선 사대부들은 유산기를 통해 산에 사는 백성들의 시련에 찬 삶을 보고하는 일을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유산기의 의미

이렇게 조선의 유산기는 조선을 알게 하는 유력한 빌미를 제공한다. 조선 사대부들이 누린 등산 문화를 통해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 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진상을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해준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등산의 제반 경향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조선의 등산과 현대의 등산이 어떤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지녔는가를 발견하게 한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는 정복욕이나 성취감을 채우기 위해 산꼭대기를 오르기 시작한 서구의 등산 경향은 근대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몽블랑산의 정상을 밟은 18세기 후반과, 스위스의 최고봉인 알프스를 정복한 19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현대적 등산의 의미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시대를 통해 서구적 등산 기술과 개념이 유입되면서 현대 등산의 본격적 항진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스포츠나 레저로 확고부동한 위상을 획득한 오늘의 등산문화 속에서 조선의 등산 기행문인 유산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서구의 등산 이데아인 알피니즘에 깊숙이 침윤된 오늘의 등산은 일단은 정상 등정에 그 의미를 두는 수가 허다하다. 가급적 고급 장비로 치장을 하고,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가급적 높은 산을 찾아 기어코 산꼭대기에 오르고야마는 행사가 바로 오늘의 주된 등산 경향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웰빙 토네이도가 몰아치면서 건강 도모를 위한 산행 인구가 막 증가하는 추세인데 이 경우에도 정상 정복이라는 목표는 거의 포기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등산은 정상 등정을 기조로 하는 매우 맹렬한 스포츠거나 경쟁적인 레저 활동으로 정착했다. 이는 조선의 등산 문화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유산기에 나타나는 선인들의 등산은 정상 정복과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있다. 등산을 산꼭대기로 데려다주는 통쾌한 행위로 인식하는 대신 산 자체와 교제하는 겸허한 인간활동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조선의 등산은 등산이 아니라 입산이었다. 산을 정복과 건강을 위한 매개나 수단으로 여긴 게 아니라 산 자체와 교감하고 동화하는 혼연일체의 사유로 산을 즐겼다. 그렇기에 한결 편리한 등산을 위해 산을 개발한다거나 하는 식의 발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산과 사람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상생하는 극진한 생태적 관념이 이미 선인들의 명민한 머리 속에 내장되어 있었던 셈이다. 말로만 아첨하는 산 사랑이 아니라 육화된 산과의 동거 양상을 유산기를 통해 똑떨어지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유산기는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등산 문화를 점검해보도록 재촉해온다. 산을 산답게 대접했던 전통 사회의 안목을 갖추라고 독촉해온다. 아울러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거나 간과했던 명산들의 새로운 정보를 막대한 분량으로 제공해준다. 선인들이 애용했던 등산 루트, 그들이 예찬했던 문화 유산과 자연경관 및 전설과 설화에 관한 생생한 소식이 유산기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유산기는 매우 명석하고도 매력적인 역사 유산이다. 오늘에 되살리고 거듭 살려 등산문화의 진보에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역사 상속품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