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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보 자료실

[펌]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1

by 日新우일신 201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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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1>

 

 

선조들의 유산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참으로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유람을 즐겼고 산수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조선시대에 유산이 사대부들의 여가활동 중 중요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이 유산을 기록으로 남겨 유산기가 나왔고 후대까지 남아 있어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으니

기록의 중요성이란 새삼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

 

조선시대의 유산기는 대략 560편정도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산기는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지리산과 청량산, 소백산, 가야산, 북한산 등의 순서로 꼽을 수 있는데

그 중에 지리산이 70편, 청량산 80편이 된다고 한다.

청량산은 지리산과 또 달라서 책을 읽는 동안 청량산이 청량하게 마음에 담겼다.

 

청량산 유산기의 전형, <유청량산록>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1>(청량산박물관 엮음/민속원)은 그동안 고 문헌에서 잠자고 있던 청량산 유산기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펴낸 책이라 한다.

청량산은 행정구역상 경북 봉화군 명호면.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예안면에 걸쳐 자리 잡고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의 속현이었던 재산현 지역이었다 한다.

 

이 산의 최고봉인 장인봉(870.4m)은 전체 둘레가 40km 남짓해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선학봉, 탁필봉, 축융봉 등 퇴적암류 특히 역암으로 이루어진 12개의 봉우리들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그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소금강이라고도 한단다.

청량산은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의 전설과 그 외 수많은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우리나라의 명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저 다섯 산을 이를 것이니,

북은 묘향산, 서는 구월산, 동은 금강산, 가운데는 삼각산, 남은 지리산이다.

그러나 적으면서 선경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신재 주세붕이 본 청량산이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1544년(중종39)에 어릴 때부터 소망하던 청량산을 일주일동안 유람한 뒤

'유청량산록을 남겼고 그 후 청량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에게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또 불교식으로 불리던 청량산 12봉우리의 이름을 유교식으로 개명하여 청량산의 이미지를

유학의 성지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발문을 쓴 퇴계는 청량산과 신재의 만남을 '산의 일대 만남'이라 했고

청량산이 임자를 만나 그 진가를 비로소 얻었다'고 했으며 '위대하시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하였다.

주세붕은 '유청량산록'에서 청량산을 또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산은 그 둘레가 백 리도 못 되지만 봉우리가 층층이 쌓여서 깎아지른 절벽을 이고 있고,

안개 낀 수목은 그리 같으니 조물주가 따로 그 재주를 부린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의 여러 산 가운데 웅장함은 지리산만한 것이 없고

깨끗하고 빼어나기로는 금강산만한 것도 없으며

반듯하고 엄숙하며 탁 트인 경치에 이르러서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업신여기지 못할 것은 오직 청량산뿐이다."

 

"아! 이 산이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이백과 두보가 시를 지어 읊었을 것이며,

한유와 유종원이 글을 지어서 구했을 것이며,

주자와 장식이 올라 감상했다면 마땅히 천하게 크게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쓸쓸하게 천년 동안 김생과 고운 두 사람에게 기대어 한 나라 안에서만 알려졌으니

탄식할 만하다."

 

청량산, 왜 '이황의 산'인가?

 

청량산을 알리는데 역할이 컸던 이로서는 단연 주세붕이요, 이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청량산이 유명해진 데에는 이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남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난 이황은 어려서부터

숙부인 이우와 형을 따라 청량산을 오가며 수양했기에 그에게 있어 청량산은 그 누구보다 각별하였던 것 같다.

 

그가 관직에 나아가서도 몽매지간에 그리워했던 청량산,

그래서 자신의 호를 '청량산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제자들과 함께 두 차례 청량산을 유람하였고

청량산을 집안의 산, 즉 오가산(吾家山)이라 칭했다 한다.

그 후 후대 사람들은 이황이 학문을 연마하던 자리에 '오산당'을 세웠고 '오가산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안동과 예안 등에 거주하는 선비들은 이곳 청량산을 학문탐구의 근원지로 이용하였으며

특히 이황의 문도들은 거의 다 퇴계의 자취를 찾아 청량산을 유산하며 자아성찰과 수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청량산을 순례하면서 퇴계 이황의 자취를 밟았고 시를 짓고 수양에 도움을 삼았다.

청량산 하면, 이황이 절로 떠오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누가 청량산을 유산하였고, 목적은 무엇이었나?

 

현존하는 80여 편의 청량산 유산기 중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청량산 최초의 유산기를 쓴 주세붕을 비롯해, 이황, 금난수, 권호문, 권우, 김득연, 금각, 조수도, 신지제, 배응경, 김중청, 김택룡, 김영조, 유진, 오여벌, 배유장 등의 유산기이다.

 

최초의 청량산 유산기를 남긴 주세붕은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을 남겼는데 <유청량산록>이다.

그는 '여러 봉우리를 눈으로 보면 나약한 사람은 바로 설 수가 있고,

여러 폭포를 귀로 들으면 탐하는 사람이 청렴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황은 주세붕의 '유청량산록을 읽고 그 감상을 기록한 것이 이황의 <주경 유청량산록발>이다.

 

<백운암기>에서 이황은 다른 낮은 곳에 있어서 '번잡함을 면할 수 없었으나

백운암은 높고 고요한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땅이 평평하고 넓어 은거하기 좋다'고 적고 있다.

금난수는 청량산을 유산하고 '수양의 방법은 자신의 공부여하에 달려 있지 장소의 시끄럽고 조용한 것과는

상관없으니 나중에 입산하여 공부하는 자는 자신이 남긴 글을 보고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권호문은 1570년11월 5일부터 12월 10일까지 한 달 넘게 청량산을 두루 감상하고 돌아와

그 감회를 기록하였는데 많은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에 청량산을 유산하였는데,

스승 퇴계만은 겨울 청량산도 유산할 만하다는 견해를 듣고 힘을 내어 산에 든다.

한 달 넘는 긴 여정을 떠나 스승인 퇴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산하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심성을 수양하고 도를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유산이었다.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권우는 39일 동안 청량산을 유람하였는데 유람할 그 시기에 이미 병이 깊은 듯 병으로 인하여 청량산을 두루 살펴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하루 햇볕 쪼여도 열흘을 춥게 하면 소용없다'(조식의 말)는 것을 상기하고 유람의 전말을 기록하여 남긴다고 적고 있다.

 

김득연은 10세 때 이미 청량산의 존재를 알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그는 청량산 유람 5일 동안 100여 편의 시를 지은 것이 특징이다.

그는 '여러 봉우리를 보면 나약한 사람은 족히 용기를 주고,

여러 폭포소리 들으면 탐욕스런 사람이 염치를 알게 되고,

총명수를 마시고 망월암에 누우면 이것 또한 신선이 된 것'이라 한다.

 

다른 유람과 차별되는 것이 있으니 신지제의 <유청량산록>이다.

그는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중에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을 찾으려는 공무수행의 일환으로 청량산을 유산하였다. 시대와 역사적 현실을 걱정하는 까닭에 생각이 구속되어 유쾌하지만은 않은 유산이 되었다.

또 김중청의 <유청량사기 병서>는 스승과 함께 유산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12일 동안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자연경관 묘사보다는 스승과 주고받는 대화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영조는 자신의 기행문에서 "봄이 와서 복숭아꽃이 피면 사람들이 무릉도원의 어지러운 길을 헤맬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를 기록하여 뒤에 유람하는 사람에게 대비하고자 한다."고 적고 있다.

 

배유장 역시, 8일 동안 청량사 일대를 여행하고서 "퇴계 선생이 말씀하신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기록이 산을 유람하는 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에 내가 본 바를 대략 기술하여 후인이 알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고 역시 기록목적을 밝히고 있다.

 

청량산 유산기의 공통점

 

대략 이들의 유산기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청량산의 자연경관도 아름답지만 유서 깊은 유적이 많고

퇴계 이황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라는 점이다.

청량산을 독서와 수양의 장소로 애용했던 것처럼,

그 뒤를 따르는 많은 선비들은 고요함을 아끼고 고독을 즐기며 자아성찰과 수양에 힘쓰고

학문적 시각을 넓히려는 목적으로 유람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청량산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안동과 그 부근에 거주하는 이들이 많이 찾았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청량산 유산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10대, 20대, 30대 젊은 날에 청량산을 유산한 자들이 많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청량산을 지척에 두고 있었든지 멀리 두고 있었던지 간에

청량산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워하며 청량산을 오르기를 오랫동안 꿈꾸어 왔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청량산 유산 때 동반한 사람들은 주로 가족이나 친구, 혹은 스승이었음을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족 동반자들 중에는 형제나 아들, 손자와 장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여 눈길을 끈다.

 

청량산 여행의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은 선인들의 유산기였으며,

중도에 중을 만나 길잡이로 삼았음도 엿보인다.

그들의 준비물은 유산기 말고도 타고 갈 말과 식량, 여분의 옷과 짚신, 책, 종이, 붓 벼루 등 문방구였다.

 

198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은 16세기 이래로 청량산을 찾는 발길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데,

책을 덮고도 청량산이 눈앞에 있는 듯 그려진다.

'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청량산'을 만난 듯 하나,

그래도 올해엔 청량산을 꼭 한 번 만나고 와야 할 것 같다.

 

이명화 기자ⓒ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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