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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1,000대명산

전북 부안 우금산(331m) 명승 울금바위와 우금산성이 품은 개암사(2024.5.25)

by 日新우일신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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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산 정상을 찾아 삼한시대와 백제의 잊혀진 전설의 무대 울금바위 일원을 돌아보다.

 

■ 산행기록 개요

1. 산 이 름 : 우금산(禹金山, 전국 1,000대명산)
2. 위 치 : 전라북도 부안군
3. 높 이 : 331미터
4. 산행일시 : 2024. 5. 25(토) 09:50-12:20 (2시간30분, 순수산행시간 1시간50분)
5. 산행거리 : 7.2km
6. 산행코스 : 개암사 주차장 → 개암사 → 울금바위(우금바위)
  복신굴(원효방)  우금산 정상 → 울금바위 → 임도 →  월정약수터 → 개암사 주차장
7. 동행자 : 산사야트레킹클럽 27명

 

■ 산행 이동 경로 (GPS 궤적)

 

 전라북도 부안군 우금산, 우금바위 소개

- 삼한 시대에 변한(弁韓)의 문왕이 난을 피하여 이곳에 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 두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동쪽은 묘암(妙巖), 서쪽은 개암(開巖)으로 불렀다. 이 전설에 의해 우 장군의 이름에서 ‘우금’이 유래하였다. 또한 바위의 형상을 보면 가운데 부분이 열린 모습이라 ‘개암’이라 하였다. 산 아래에 있는 사찰 개암사(開巖寺)는 우금바위의 별칭인 개암을 이어받은 것이다.

우금바위는 변산반도의 동부에 위치한 우금산[329m] 정상에 있는 큰 바위로 우금암(禹金巖)이라고도 한다. 동쪽 바위는 40m, 서쪽 바위는 30m이다. 우금산은 개암사 뒤쪽에 있으며, 산의 능선을 기준으로 남사면은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북사면은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 해당한다. 우금바위 하단부에는 세 곳에 동굴이 있는데, 분류상 풍화 동굴로 암석의 절리면(節理面)을 따라 풍화가 진행되어 형성된 동굴이다.

부안 우금바위 일원은 2021년 6월 9일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907,398㎡이다. 우금산 정상에 우뚝 솟은 우금바위는 산 아래에 있는 개암사에서 오를 수 있으며, 개암사의 병풍 역할을 하고 있다. 우금바위는 산 정상에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보이므로 이 지역 주민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우금바위 아래쪽에 있는 세 개의 동굴 중 가장 작은 북쪽의 동굴은 백제 부흥 운동 당시 군사들에게 필요한 옷을 만들기 위해 베를 짰다 하여 베틀굴이라 한다. 가장 규모가 큰 서남쪽의 동굴은 백제 부흥 운동 당시 복신(福信)[?~663]이 거처한 굴이라 하여 복신굴이라고 한다. 백제 부흥 운동기에 우금산성에서 저항할 때 지휘소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남쪽의 동굴은 원효방이라고 부르는데, 지표면에서 약 20m나 되는 암벽 중간에 있어 사다리나 밧줄이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이다. 원효방은 높이 5m, 폭 5m, 동굴 깊이 10m 정도로 통일 신라 시대 원효 대사(元曉大師)의 수도처로 추정되는 곳이다.

우금바위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연결한 길이 약 4㎞의 석성(石城)이 우금산성(禹金山城)[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이며, 우금산의 동쪽에 위치한 이른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삼한 시대 변한의 문왕이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660년 백제 멸망 직후 3년간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周留城)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참조)

 

- 부안 우금산과 관련하여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실경산수화 '우금암도'가 존재하여 흥미를 끈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강세황의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 울금바위유람기)’ 등 관련 자료를 아래 링크로 남겨둔다.

 

https://gudaragouri.blogspot.com/2011/05/76.html?m=1

 

76. 우금암(禹金巖)을 아시나요

우금암은 전북 부안군 상서면 ( 上西面 ) 의 우금산 (331 미터 ) 정상에 있다 . 산 꼭데기의 거대한 바위가 현저하게 눈에 띄어 바위의 이름이 생겼다 . 그리고 바위의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이 우

gudaragouri.blogspot.com

 

http://www.sjbnews.com/news/news.php?number=698457

 

“가마를타고월고리봉수대를올랐다누대앞에다섯봉우리의봉화대가늘어서있었다누대에올라서

표암강세황17131791이부안월고리봉수대를찾은것은1770년5월이다부안봉수는연안봉수로격포의월고리봉수대대항리의점방산봉수대그리고계화도의계화봉수대가있었다월고리봉수는무장현의소응포

sjbnews.com

 

■ 전라북도 부안군 우금산, 우금바위 산행 후기 및 사진 정보

- 대구 엑스코 행사 3박4일 출장에서 쌓인 피로를 감안하여 손쉬운 산행지를 선택했다. 워낙 낮은 산이고 산악회도 트레킹 위주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조금은 싱거운 일정. 그러나 사진에서 본 울금바위에 호기심이 동하여 가볍게 나선 길이다.

산행은 예상보다 더 싱거웠지만 지도상의 우금산 정상을 다녀오느라 비탐구간을 홀로 다녔더니 엉뚱한 후유증이 남았다. 왼쪽 팔뚝에 풀독이 올라 잔뜩 부풀어 오른 것이다. 하절기에 반팔이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낮은 산이라고 가벼이 여긴 탓이다. 산행을 나설 때는 그저 늘 경계하고 조심하여야 하거늘.. 

 

 

▼ 능가산 개암사라 적힌 일주문을 지나고, ▼

 

 

▼ 전나무 숲 사이로 울금바위가 머리를 내밀었다. ▼

 

- 개암사(開巖寺)는 634년(무왕 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676년(문무왕 16)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우금암(禹金巖) 밑 굴속에 머물며 중수했다고 하며, 1276년(충렬왕 2) 원감 국사(圓鑑國師) 때에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1414년(태종 14) 선탄(禪坦)이 중창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최근에 입구 일주문을 다시 새롭게 단청하고, 천황문, 개암 차당(開巖茶堂) 등을 조성하여 현재 대가람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건물은 입구의 일주문, 개암 차당, 종각(鐘閣), 지장전(地藏殿), 응진전, 대웅보전, 관음전(觀音殿), 종무소,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체를 완성하고 동국 진체(東國眞體)를 이룩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서예가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개암사 뒤편으로 우금암이라고 하는 큰 바위가 병풍처럼 산 정상에 서 있는데, 백제의 주류성(周留城)으로서 백제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 부흥 운동을 폈던 역사적 장소로 유명하다. 한편, 개암사는 개암 죽염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개암 죽염은 개암사 승려들이 예로부터 소금을 대나무 통에 넣어 굽는 비법을 개발·전승하며 만들어온 죽염이라고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 개암사를 병풍처럼 지킨다더니 과연 대웅보전 뒤로 울금바위가 우뚝하다. ▼

 

 

▼ 당겨본 울금바위(우금암). ▼

 

 

▼ 대웅보전의 모습. ▼

 

 

▼ 개암사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

 

 

▼ 인적없는 숲길을 걸어가면, ▼

 

 

▼ 금새 울금바위 밑으로 도착한다.

개암사에서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금줄을 넘는다.

지도상의 우금산 정상을 가는 길인줄 알았더니 알고보면 여기가 아니다. ▼

 

 

▼ 절벽 중간에 동굴이 보이는듯도 한데 더이상 진행이 불가능하여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

 

 

▼ 울금바위 왼쪽으로 돌아오르자 사진으로 보던 복신굴(원효방)이 나타났다.

잠시 알바하는 사이에 우리 일행 몇 사람이 먼저 도착하여 기분을 내고 있다. ▼

 

 

▼ 복신굴 내부는 백명 이상이 들어갈만한 거대한 공동(空洞)이다. ▼

 

 

▼ 사뭇 이국적인 풍광에 한번더 눈길을 주고. ▼

 

 

▼ 울금바위 왼쪽으로 계속 진행하니 오른쪽으로 정상가는 금줄이 보인다. ▼

 

 

▼ 결국 울금바위 뒷쪽을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

 

 

▼ 이게 베틀굴인지??. ▼

 

 

▼ 능선으로 올라 돌아본 울금바위.

나는 사진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온 것이다. ▼

 

 

▼ 우금산 정상가는 길은 생각보다 뚜렷하다.

다만 사람다닌 흔적이 거의 없어 거미줄과 나뭇잎을 맨몸으로 훑으며 지나가야 했다. ▼

 

 

▼ 우금산성의 흔적. ▼

 

 

▼ 거미줄이 계속 얼굴에 달라붙어 영 찜찜한 느낌이다. ▼

 

 

▼ 문득 뒤로 돌아본 변산 일대 파노라마. ▼

 

 

▼ 당겨본 쇠뿔바위봉 능선길. ▼

 

 

▼ 앙증맞은 정상석을 만나기까지는 금줄로부터 18분이 걸렸다. ▼

 

 

▼ 우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

 

 

▼ 당겨본 울금바위. ▼

 

 

▼ 정상석 뒷편에도 근사한 암봉이 보이는데 길은 보이지 않는다. ▼

 

 

▼ 정상석 뒤 무너져내린 산성의 흔적 위에서 바라본 울금바위. ▼

 

 

▼ 당겨본 사산저수지 일대. ▼

 

 

▼ 한참을 쉰 뒤 울금바위를 바라보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

 

 

▼ 건너편 쇠뿔바위봉과 그 아래는 유동마을인지??. ▼

 

 

▼ 당겨본 유동마을 일대. ▼

 

 

▼ 돌아가는 길도 온통 맨살로 숲을 헤치며 지나가야 하니 결국 반팔 티를 입은 것이 화근이었다.

집에 돌아와 살펴보니 왼팔뚝이 풀독이 올라 엄청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

 

 

▼ 베틀굴(??)로 다시 돌아와서, ▼

 

 

▼ 정규 등로에 합류하여 한숨을 돌린다.

우금산 정상까지 왕복 50분이 걸렸다.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30여분이면 충분한 구간이다. ▼

 

 

▼ 이제 나머지 구간은 걸만 길었지 룰루랄라 둘레길 유람이다. ▼

 

 

▼ 멀리서 보였던 봉우리들은 모두 올라갈 수 없도록 막아 놓았다. ▼

 

 

▼ 부안 변산 일대에서 항상 느끼지만 곳곳에 출입금지 표시가 너무 많다.

분명히 다른 국립공원 지역과는 다른,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느껴지는 표지들이다. ▼

 

 

▼ 그리하여 아무런 조망도 없는 능선길을 무작정 걸어간다. ▼

 

 

▼ 둘레길 탐방중이던 산악회 후미 일행을 만나 대충 추월하고, ▼

 

 

▼ 임도 옆 그늘에 앉아 소주 한 모금을 마시며 여유를 부린다. ▼

 

 

▼ 소주 마시며 노는 동안 앞서가는 후미 일행을 다시 추월하고, ▼

 

 

▼ 마실 수 없는 월정약수에서 세수를 하였다. ▼

 

 

▼ 주차장가는 포장도로에서 올려다 보이는 울금바위. ▼

- 김기병(金基炳, 1831-1895)은 부안 상서면 내동마을 출신으로 부안 내에서 농사 재벌이 된 인물임.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김기병은 부안일대의 농민군 지도자가 되어 기포함 이후 부안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을 조직하고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킴. 1894년 4월 1일에는 5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부안성을 무혈입성하고 백산대회에도 참여함.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에도 김기병은 부안에서 은밀하게 활동을 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어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에서 처형됨.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재 김기병 행적비>는 2010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의 묘소에 세움(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료 참조)

 

 

▼ 버스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여 또 20여분을 기다린 후 격포항으로 이동하였다. ▼

 

 

▼ 14,000원이나 받는 해물짬뽕에 소주 한 병으로 뒷풀이를 즐긴다.

샤스타데이지 군락지를 경유한다는 산악회 일행들을 따라 관심없는 변산마실길을 몇 군데 돌아 인천으로 귀가하였다. 잠이 들만 하면 버스가 서는 통에 묘하게 피곤하고 지루한 하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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